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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1883년 4월 1일)에서, 

빈센트는 "'레미제라블'을 또 읽고 있다"고 씁니다. 


박근혜 치하에서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불끈 쥔 한국인처럼, 

빈센트 반 고흐도 '레미제라블'에 감동했다니, 


"요~ 친구, 빈센트!"라는 소리가 나올 것처럼 친근감이 듭니다. 

레미제라블을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지요? 


그는 '절망적인 사람들'의 편에 서고자 했고,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그랬습니다. 



흔히 우리는 빈센트를 해바라기와 별밤의 화가로 압니다. 


꽃병에 잘 꽂혀진 해바라기 같은 '정물' 그림은, 부르주아의 상징이겠지요. 정갈한 실내에서 인생의 멋을 즐길 줄 아는...


또한 ‘스타리 스타리 나잇(Starry Starry Night)~’이란 노래 가사처럼 

그의 대표작인 ‘별이 빛나는 밤에’와 '밤의 카페 테라스'는 낭만적이지요? 


그래서 그는 낭만적인 음유시인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러나, 그의 생애 스토리를 따라가보면, 이런 낭만적 흥얼거림은 쑥 들어갑니다.

 

그가 가장 먼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곳은, 바로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는 광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박홍규 교수는 빈센트의 초기 습작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게 된 가장 강한 동기는 광부들의 처지에 대한 일체감이었다. 그의 초기 습작은 몇 점 안 되지만, 그야말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89쪽) 


'사회주의'란 무서운 단어가 갑자기 툭 튀어나옵니다 그려.



빈센트의 인생 초기 스토리를 들어보면, 그가 잘나가는 집안의 자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듣기 쉽게 요약하자면, 


'집안 빽'으로 맏아들을 삼성전자에 꽂아넣었더니

이 친구가 갑자기 인생 고민에 빠져 "목사가 되겠다"며 난리를 치다가 

탄광촌에까지 들어가 울며불며 하는 


간단치 않은 스토리 라인을 연상하시면 거의 비슷할 것 같습니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시골 조그만 교회의 목사로서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교단이 공급한 집에서 하녀와 요리사를 두고 살 정도로 ‘말하자면 상류층’이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헤이그의 부잣집 딸로서, 인생 초년기에 빈센트는 주로 외가쪽 도움으로 잘 나갑니다.


친척의 주선으로 구필 화랑(Goupil & Cie)이라는, 당시 국제적으로 지부망을 갖춘 화랑의 직원으로 뽑혀들어갑니다. 헤이그 일터로 들어간 그의 나이는 당시 겨우 16세. 


우리가 상식처럼 아는 ‘가난-고독의 화가 빈센트’와 

‘넥타이 차림의 깔끔한 그림 중개인’과는 잘 연결이 안 되지만, 

사회 초년병으로서 그는 잘 나가는 청년이었습니다. 



수습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빈센트는 더 큰 구필 화랑 런던지점으로 영전했고,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도 일합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넥타이 맨 빈센트가 왜 갑자기 탄광으로, 그것도 유럽에서 가장 사고가 많이 나 유럽 사회주의의 격전지 역할을 했다는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으로 들어가게 됐을까요? 


이를 박홍규 교수는 저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 노동자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아나키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부자들에게 그림을 파는 일로 일생을 바친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되어 화랑 일에 완전히 흥미를 잃게 되었다. (87쪽)

  

빈센트는 살롱풍 작품들에 진저리 (중략) 파리의 화려한 세계에도 등을 돌리고 오로지 성경 공부에만 매달렸다.(90쪽)


처음에는 ‘우수 사원’이었던 빈센트는, 

그림을 단지 돈으로만 아는 화랑 측, 

그리고 그런 그림들을 거래하는 돈만 많은 바보 고객에 대한 화가 쌓여, 


‘사야 할 그림'을 놓고 고객과 언쟁까지 벌이는 심각한 사태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이런 겉만 번지르르한 그림 따위를 사냐?"고 시비를 걸어서야 장사를 할 수 없었겠지요?


세상의 부조리에 환멸을 느낀 그는 사랑에도 실패하면서(앞으로 수없이 반복되는 사랑 실패의 첫 번째) 

점점 성경에만 빠져들어갑니다. 


화랑에서 쫓겨난 빈센트는 처음에 목사가 되려 했습니다. 

‘꼰대스럽게 목회를 하는' 아버지와는 평생 불화했지만, 

그 나름의 새로운 목회를 꿈꿨던 것이지요. 


이번에도 역시 가족 빽의 도움을 받아, 

당시 네덜란드 최대의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했던 신학자 친척의 집에 기거하면서 

암스테르담대학 신학과 입학에 도전하지만 시험에 떨어집니다. 

대신 그는 3개월짜리 단기 신학(개신교) 과정을 마치고 전도사가 되어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으로 파견됩니다.


“죄다 기독교인 유럽 안에서 무슨 전도사가 필요하냐”고 하기 쉽지만, 신교와 구교가 경쟁하고, 신교 안에 또 여러 교파가 있으니, 각 교단이 전도사를 외진 지역으로 파견하곤 했나 봅니다.


보리나주라는 탄광촌에 들어간 빈센트는 처음에는 탄광촌의 아름다움에 빠집니다. 탄광촌에서 처음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뿐입니다. 



그러나 가스 폭발 사고가 터져 사람들이 죽고 나가고,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그는 탄광의 비극에 비로소 눈을 뜹니다. 


정선에 처음 간 서울내기가, “야, 경치 좋네” 하다가, 

탄광 사고를 경험하고 광부들의 집에 가본 뒤 처참한 기분이 빠지는 식이지요.


탄광촌에서 빈센트의 변신에 대해 박 교수는 책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 노동자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아나키 유토피아’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가스 폭발 사고 이후 빈센트는 자기 생활이 사치스럽다고 느껴 광부촌의 오막살이집으로 이사하고 자신이 가진 빵과 옷을 광부들에게 나누어주었다.(111쪽)  


자신은 맨몸으로 울면서 겨울밤을 보냈다.(128쪽) 


자신의 옷을 잘라 그들의 상처를 동여매고 굶주린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초라한 식사를 먹였다.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 더러운 누옥의 바닥에 누워 눈앞의 현실이 자신의 잘못 탓이라며 절망에 울었다. 그는 광부들과 살고자 목욕하는 것도 중단했다. (113쪽) 



교단이 마련해준 넉넉한 집을 포기하고 광부 마을의 헛간 같은 데로 숙소로 옮기고, 

음식과 옷을 나눠주고 

자신은 목욕도 않고(광부들이 그렇게 사니) 

한겨울 옷도 없이 맨땅에 누워 울면서 밤을 지새웠다니...


참으로 이 빈센트란 사람은 놀랍습니다....


빈센트의 보리나주 시절 초기에 광부들은 빈센트를 존경했으나 차차 광인으로 손가락질을 하게 되었다.(116쪽)


처음에는 그의 ‘지나치고 별난 사랑’에 감동을 받은 광부들이었지만, 곧 그를 미친 놈 취급하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광부들의 이런 배반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교단의 징계요, 다른 하나는 빈센트 자신의 행동거지입니다.  


빈센트의 편지를 소개하는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에서 박 교수는 그 과정을 이렇게 전합니다. 


1879년 7월 말, 빈센트는 전도사에서 해임되었다. 보리나주를 찾은 전도단이 형편없는 고행자의 모습을 한 빈센트를 보고 놀란 결과였다. 그들에게 전도사란 모름지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간, 그들이 동경한 부르주아의 미덕을 체현한 인간이어야 했다. 그러나 빈센트는 당시 부르주아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가난한 광부들과 완전히 일체화되고자 했으므로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88쪽)


기독교는 습관적으로 설교하죠. “낮은 데로 임하라”고. 

하지만 빈센트처럼, 노동자처럼 낮아지면, 부르주아적인 교단 상층부 분들은 싫어하걸랑요. 


낮은 데로 임하라고 설교하지만 너무 낮아지면 안 되요. 그러면 잘려요.

낮아지더라도 "부르주아이면서 낮아지라"는 게지요. 

    

물론 빈센트 쪽의 잘못도 있지요. “낮아지라”는 말의 뉘앙스를 눈치 빠르게 캐치해야 하는데, 그는 성경 속 말씀을 그냥 곧이곧대로 믿어버렸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물론 나중에 그는 이런 한심한 기독교 자체에서 벗어난다는 게 박 교수의 해석입니다. 


너무 낮아진 그는, 

광부처럼 되려고 목욕도 하지 않고, 

전도사다운 옷차림-헤어스타일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물론 빈센트가 이렇게 외모에 1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데는 그 나름의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880년 7월 보리나주에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너도 잘 알 듯이 나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아. 나도 그걸 알고 있고 내 꼴이 충격적이라는 것도 인정해. 그러나 생각해봐. 그것은 내가 외모를 꾸미는 일에 환멸을 느낄뿐더러 그런 데 쓸 돈이나 재산이 없기 때문이야. 게다가 그것은 자신의 공부에 깊이 전념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해.” 


외모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공부(일)에 더 집중하는 빈센트의 자세는, 

‘튀지 않고 평범히'가 최고인 성직자나 광부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테고, 

결국 그는 교단에서 잘리고, 광부들로부터는 “미친 X” 소리를 듣게 되는 거지요. 


돈 맥클린의 노래 가사 그대로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이며, 


Queen의 노래 제목처럼 

Too Much Love Will Kill You입니다. 


세상의 관습을 무시하면서 '너무 사랑한' 빈센트는 편지(1880년 7월)에 이렇게 씁니다. 


“나는 신을 아는 최상의 방법은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신은 그에게 자신을 알려주기 위해 곧이어 그에게 그렇게도 많은 고통을 주었던 걸까요? 

그가 떠난 뒤 이제 지구인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나요? 

노래 가사의 

'Perhaps they'll listen now'처럼? 



탄광 선교사 일자리에서 잘린 뒤 

무일푼으로 브뤼셀까지 걸어가 과거에 자기를 보리나주로 파견한 목사를 만나 복직을 만난 그는 


목사에게 그림들을 보였다. 세상에서 최초로 그의 그림을 본 목사는 빈센트에게는 종교보다 예술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 그림을 그리라고 충고했다. 그 순간 빈센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89쪽)


신의 지시라도 들은 듯, 빈센트는 이제 미친 듯이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회차에는 농부를 그리는 빈센트 얘기입니다. 

당시만 해도 '농부 = 노동자'였으니까요. 


물론 Too Much Love를 주고 배척 당하는 스토리는 농촌(아버지가 목회를 하는 에텐 지역)에서도 계속되지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책 읽는 북손탐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재밌는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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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남한의 3.1절과 북한의 3.1절이 다르다고? ‘3월 김정은 답방’을 앞두고 해석 통일 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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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18살 함석헌 소년은, 3월 1일 그날 일본경찰 코앞에 태극기 마구마구 흔들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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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윤치호는 왜 “총독부가 아무리 '왜설날' 강요해도 조선인은 끝내 설 쇤다”고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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