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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한민족이 많은 피를 흘린 3.1운동이 거둔 결실 중의 하나였죠. 


문재인 대통령께서 충칭 방문 때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았던 충칭에서의 사진과 똑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도 멋있고 감동스러웠습니다. 



헌데, 이런 감동과는 별개로 

임시정부 수립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한다니, 

"임정이 한 일이 뭐지?"라고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책 속의 문장을 인용해 봅니다. 

역사를 보는 시각-견해는 각기 다를 수 있지만, 

'팩트'는 불변이기에 

임시정부에 대한 팩트를 한 번 보자는 소리입니다.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강행 움직임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진보적 역사 연구가' 심용환 선생이 펴낸 책 

'단박에 한국사 - 근대편' 355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920년 한 해에만 국내로 진공을 목표로 한 유격전이 1700여 건이었을 정도로 몸서리치는 노력을 합니다. 1921년에는 602건, 1922년에는 397건, 1923년에는 454건, 치열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분투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1921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의 갈등이 심해지고, 간도참변-자유시참변 등 만주 일대에서의 독립운동이 상당한 위기에 처함에도 이런 기록적인 수치가 나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1920년은 만주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기록적인 해입니다.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여 일본 사단 병력을 물리치는 대업을 이루어내니까요.. 1920년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꼭 기억해야 할 연도입니다.


3.1운동이 대실패를 맞본 뒤(민족대표 33인이 전국적 지휘는커녕 독립선언서만 만들어놓고 가두행진-시위를 하는 학생-시민들을 내팽게둔 채 경찰에 자진신고해 유치장 속으로 숨어버렸으므로) 


1920년 한 해에만 무려 1700건(하루에 5회 꼴)의 전투를 일본 정규 부대와 벌였다니, 참으로 후덜덜 떨릴 뿐입니다. 


그래서 위 책에도 나오지만 1920년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란 업적을 독립군이 남긴 해이기도 합니다. 



헌데, 위 인용문에서, 

레코드판이 튀듯, 불협화음을 내는 부분이 보이시죠? 


바로 '1921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의 갈등이 심해지고'란 부분입니다.  


상해임시정부는 처음 출발부터 엄청난 파벌 싸움을 기록합니다. 


임정은 처음에는 임시의정원 형태로, 즉 의원내각제 형태로 짜여지지만, 

리승만(스스로를 "이씨조선의 왕족"이라고 자부했던)의 강력한 고집에 따라

리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신채호 선생은 임정을 떠났다고 이 책의 333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주에서 안창호가 상당한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오면서 (8개나 생겼던 임시정부들의) 통합 작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중략) 국무총리도 아니고 이승만 자신이 고집했던 대로 대통령으로 추인돼요. 그러자 신채호는 임시정부를 떠납니다 .



상해임시정부의 잘난 분들(요즘 시쳇말로는 "정치꾼들"이라고 비난할 소지도 있는)이 엄청나게 내분을 일으키는 동안에, 


김좌진 장군 등을 비롯한 만주의 독립군들은, 

"고국 땅으로 단 한 발이라도 들어가서 죽자"며 

일본의 정규군 병력과,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루에 5회꼴로나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장비와 인력, 기동력-돈을 모두 갖춘 세계 최강 수준의 일본 군과 싸운 

독립군들이 대번에 승리해 조선반도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물론 그런 독립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독립군은 질지 알면서도, 

그래도 "이렇게 아직 싸우는 조선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조선 땅으로 한발이라도 들어가 죽겠다"며 싸웠다고 전해집니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의 "정치꾼들"이 온갖 추문을 일으키면서 

정치-파벌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그리고 임시정부의 운영비는 하와이 등지에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한푼두푼 정말 피같은 돈을 모아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돈으로 유지됩니다. 더구나 리승만은 이 피같은 돈을 사기쳐 먹어 큰 파문을 일으키기고 하지요), 만주의 독립군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있었다는 소리가 되지요.



위 캡처 화면은 경향신문이 단독보도한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자금을 모은 하와이 동포들의 기금을, 미국에서 편하게 지내던 리승만이 사기쳐 먹은 의혹'에 대해 보도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봅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그리고 폼도 나지만, 


임시정부 수립일을 기념한다면, 


그보다 더욱 중요한 날인, 

독립군이 군대를 결성한 날, 

죽으러 가는 줄 알면서도 일본 정규군과 싸우러 간 날, 

이런 날들도 기억해줘야, 기념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양복 입고 활동한 상해임시정부의 설립일은 기념되고, 

맨땅에 피를 뿌린 독립군의 그날들은 기억하지 않는 것 같아, 

괜히 울컥하는 오늘입니다...........ㅠㅜ



<3.1절 100주년 속살읽기 시리즈~>


[①] 남한의 3.1절과 북한의 3.1절이 다르다고? ‘3월 김정은 답방’을 앞두고 해석 통일 하려면?






[②] 유치장으로 ‘도피’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일본 학계 “33인은 어떻게 봐도 어이없는데, 33인을 대단하다고 가르치는 남한은 쫌 이상” 혹평





[③] 18살 함석헌 소년은, 3월 1일 그날 일본경찰 코앞에 태극기 마구마구 흔들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3.1운동 속살읽기 ④] “죽기 딱 좋은 날”이라며 3.1거사 반기고 준비한 남강 이승훈 선생의 결기와 실행







<설날에도 항일의 냄새가? 시리즈>


[①] 윤치호는 왜 “총독부가 아무리 '왜설날' 강요해도 조선인은 끝내 설 쇤다”고 썼나?






[②] 염상섭의 ‘지 선생’은 어떻게 침뱉어 만세 부르고, 총독부는 이를 ‘정의롭게’ 만들어줬나








 



<책 읽는 북손탐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재밌는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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