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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여의도에서 열린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식에서 이낙연 총리께서 하신 연설 중에 “저건 아닌데…”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임시정부는 (중략) ‘태극기’와 ‘애국가’를 국가상징으로 공식화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기틀이 그때 만들어졌습니다”라는 연설 부분이었습니다. 한번 들어보실까요?

 

바로 “임시정부는 (중략) ‘태극기’와 ‘애국가’를 국가상징으로 공식화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기틀이 그때 만들어졌습니다”라는 연설 부분이었습니다. 한번 들어보실까요? 

 

https://youtu.be/NlIdjTd_eDI

이 동영상의 2분 5초 쯤에 애국가 선정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부분은 자칫 오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안익태 애국가’ 곡조를 상해임시정부가 공식 국가로 선정했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이해영 저 ‘안익태 케이스’ 25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입니다.

 

아무튼 임시정부는 전후 귀국해서도 여전히 ‘올드 랭 사인’에 맞춰 ‘애국가’를 부른다.

 

옛 애국가 곡조는 현재의 애국가와는 다르지요.

2002~3년 방연된 TV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한용운 선생이 식당에서 이 곡조의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https://youtu.be/jLa8cXyVIaI

이 애국가의 가사는 지금의 '안익태 애국가'와 거의 동일하지요.

 

애국가 가사의 작사자에 대해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한때 선각자였으나

일제 말기에 친일파로 돌아선 윤치호 선생이

‘1907년에 내가 작사했다’는 의미의 글(아래)을 후손들에게 남긴 바 있어,

대체로 '윤치호 작사'라는 게 정설입니다. 

 

아래는 윤치호 선생이 가족들에게 남긴 애국가 가사 서예입니다. 

 

이 붓글씨는 윤치호가 1945년에 가족에게 써준 것으로,

1907년에 자신이 쓴 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사의 연원은 멀리 대한제국 말까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지요.

 

일제 치하와 독립군 등이 ‘애국가’를 불렀다면,

그건 윤치호의 시에,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조를 붙인 것이었죠.

 

미국에서 첼리스트로 활약하던 젊은 안익태의 모습. 왼쪽은 조선일보 1934년 2월 15일자.

안익태 선생은, 자신이 새 애국가 곡조를 만든 뜻을

미국에서 발행됐던 독립운동 기관지 ‘신한민보’ 1936년 3월 26일자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합니다. (‘안익태 케이스’ 21쪽에서 전재)

 

“사방으로 헤매이는 불쌍한 우리 이천 만 동포 앞에서 연주하는 감이였는데 눈물은 제 앞을 가리워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상이었습니다.

(...)

저대로 부르는 애국가 음악 곡조는 처음 스캇취의 술 노래였는데 그 후 구주 여러 나라에서 별별히 불렀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사랑가로도 부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별가로도 부르는데 참으로 신성한 대한국 애국가로서 그 곡조를 사용함은 대한국의 수치인 줄로 자각하였습니다.”

 

안익태의 이 자필 글을 보면 1935년~1936년 초에 안익태가 미국에서 애국가 곡조를 작곡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익태 애국가’는,

미주 한인 동포들 사이에서는 불렸을지언정

한반도에 소개된 바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되겠지요.

 

위 사진은 1945년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발간했다는 낱장 '한국 애국가' 유인물로, 

'안익태 애국가'의 악보를 '한국 애국가'로 소개하고 있기에, 

임정이 안익태 애국가를 공식 애국가로 지정했다는 주장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지만,

 

해방 뒤 귀국한 김구 선생 등 상해임정 주요 인사들이

계속 ‘올드 랭 사인’ 곡조로 불렀다고 이해영 교수는 썼기에, 

정확한 팩트가 앞으로 확정돼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안익태 애국가'로 대한민국에서 널리 불려진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안익태 케이스’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안익태 애국가는 ‘기독교, 미국, 서북’, 곧 당시 남한의 주류 네트워크에 올라타 증식되고 있었고 안익태 신화는 갈수록 메아리처럼 증폭되고 있었다.

(중략)

해방 공간에서 김순남의 ‘해방의 노래’나 ‘인민 항쟁가’는 사실상 애국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순남은 일찌감치 북으로 넘어가 있었다. 극심한 좌우 대립과 이념 갈등, 그리고 마침내 터진 한반도전쟁은 안익태 애국가로선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었다. (155-6쪽)

 

 

해방 뒤 미군정의 지원을 등에 엎고 남한의 실권을 장악한 이승만 계열(기독교, 미국, 서북)이 같은 뿌리를 가진 안익태(기독교, 미국, 서북)의 애국가를 강력하게 밀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해영 교수는 이번 책에서, 대한민국의 국가는 ‘안익태 애국가’로 한다고 법으로 정해진 바가 없으며, 그냥 사실상의 국가로 불릴 뿐이라고 설명해줍니다.

 

'소련을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서북청년단.

그럼 다음 편에서 또 만나요~~~

 

<따박따박 읽어내는 북손탐의 동영상 추천>

https://youtu.be/eyZeqS0O5tE

https://youtu.be/M0OxTQmT4IU

 

https://youtu.be/A37gd0YRi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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